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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강좌 : [불교교리강좌] 삼법인 강의 (9) - 제법무아의 생활실천, 지관 수행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가 실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인연따라 잠시 모임으로써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언젠가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다. 이처럼 ‘일체 모든 것’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무아라면 그 어떤 것에 집착할 수가 있을까. 내가 집착할 수 있는 일체 모든 대상들은 전부 무아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이름을 써 놓고 고집을 부려 봐야 어디에도 영원한 ‘내 것’은 없다. 내가 없을진대 내가 소유하는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끝끝내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며, 애욕과 욕심의 충족만이 살 길인 양, 돈과 재산과 소유를 늘리는 것만이 내 생에 가장 큰 목표인 양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만히 세상 사람들의, 또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라.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아상(我相) 때문이요, 아집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나를 위해, 내 소유를 늘리기 위해,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고되고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우리가 집착하고 욕심부리며, 아등바등거리고 잘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사는 그 모든 이유의 중심에 ‘나’가 있다[我相]. ‘나’에 대한 집착이 있다.[我執] 나를 위해 그렇게 애쓰고 살아왔다.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위, 내 돈, 내 집, 내 차, 내 사람, 내 사랑, 내 자식, 내 가족, 내 나라, 내 회사, 내 소유, 내 생각, 심지어 나의 깨달음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눈물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가 없다니. 제법무아,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다니. 무아라는 가르침은 인류 역사, 인류의 정신사 속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파격적인 가르침이다. ‘나’를 믿고 의지하며 나 하나 잘 돼 보겠다고 살아왔던 모든 이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좌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과연 이 사실이 우리에게 좌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허감, 무력감, 허무주의 같은 슬픔만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리석고 얕은 사유 속에 헤매는 이들에게 이것은 일견 죽음과 비견되는 아픔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사유해 본다면 제법무아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안과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 주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갈 이유도 없고,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내가 사랑을 하고, 삶을 살아가며, 내가 일에 대한 성취를 하고, 내가 지고의 깨달음을 얻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무아의 단편만을 본 단견(短見)에 불과하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 삶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자유롭다. 내가 있다고 하면 나와 비견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나와 상대의 차별을 가져온다.

상대방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차별에서 행과 불행이 생겨난다. 아무리 내가 잘나고 업적을 성취하고,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역시 나보다 더 높은, 나보다 더 많이 가진, 내가 부러워 할 만한 상대는 끝도 없이 널려 있다. 아무리 소유를 늘리고 권력과 지위를 높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나보다 더 낳은 사람이 있는 한 내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설령 경제력에서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복이 1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정치가를 부러워 할 지도 모르고, 혹은 발우 하나에 걸망 하나 짊어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수행자를 부러워 할 지도 모른다. 내가 있고, 내 소유가 있는 이상, 아상이 있는 이상 우리의 행복은 영원토록 실현 불가능하다.

나와 너라는 나뉨이 모든 불평등을 가져오고, 모든 폭력을 가져오며, 행과 불행을 가져오고, 일체 모든 다툼과 불만족과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가져온다. 나와 너가 나뉘어 있는 이상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르며, 한 쪽은 좋고 다른 한 쪽은 나쁘며, 한 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 쪽은 가난하고, 한 쪽은 진실하며 다른 한 쪽은 거짓이고, 한 쪽은 행복하며 다른 한 쪽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고 한 쪽은 다른 한 쪽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나아가 이 종교는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이며, 우리나라는 옳고 다른 나라는 그르며, 내 편은 좋고 상대편은 나쁘다. 거기에서 종교간의 갈등과 전쟁도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있다. 또한 나뉨 속에서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생겨난다. 내 것이 부족한 것 같으니 상대의 것을 탐낼 수밖에 없고, 나는 옳은데 상대는 나의 옳은 점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데서 성내는 마음, 진심이 일어난다. 이 모든 나뉨과 분별과 ‘나다’하는 아상이 바로 치심, 즉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모든 다툼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데서 생겨난다.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그 근본 바탕에 ‘나다’하는 아상이 있다. 아상이야말로 모든 다툼과 탐진치 삼독의 뿌리요, 행복과 평화와 평안과 자유와 열반에서 멀어지게 지름길이다. 나다 하는 아상을 버리고, 제법무아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은 나뉨과 다툼과 분열과 전쟁에서 놓여난다. 아집과 분노와 소유욕과 고집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제법무아는 우리의 삶을 다툼이 없는 완전한 평화로 이끈다. 그러면 제법무아의 실천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버리는 것은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며,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내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끊임없이 무소유, 무집착, 무소득, 무분별, 무아를 설하는 이유다.

집착을 놓아라, 방하착하라, 욕망을 버리라, 소유를 최소화하고 만족을 늘리라, 본래 얻을 바가 없음을 알라, 분별하지 말라, 아집을 놓아라, 아상을 버려라,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번뇌를 놓아라 하는 이 모든 실천적 가르침의 원동력이자 근거가 바로 제법무아이다.

그야말로 제법무아는 일체 모든 것을 놓고 비우도록 이끈다. 놓고 비웠을 때 본래 텅 빈 공의 진리가, 연기의 진리가 꽃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놓아지는가. 놓고 비우고 싶지만 도저히 놓아지지도 비워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아를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깨닫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있는 그대로 관(觀)해야 한다. 현실을 치우침 없이, 사견 없이, 판단 없이,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설하게 될 팔정도의 정념(正念)이요, 그러한 치우침 없는 관찰에서 나오는 바른 견해가 정견(正見)이다. 관 수행에 대해서는 뒤에 사성제와 팔정도, 사념처에서 좀 더 다루기로 한다.

이 두 가지, 제법무아에서 오는 비움과 관찰의 실천이 바로 지관(止觀)이요, 정혜(定慧)다. 지(止)는 애욕을 그치고, 집착을 멈추며, 분별을 놓아버리고, 아집과 아상을 비우는 ‘비움’과 ‘놓음’, ‘그침’의 수행이요, 관(觀)은 분별 없는 알아차림, 관찰,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뒤에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이 두 가지 수행법이야말로 불교가 불교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정법의 기준이요, 수행의 핵심이다.

불교의 근거가 되며 진리의 법인이 되는 삼법인을 토대로 나온 실천적인 가르침이 바로 지관이기 때문에, 지관 수행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핵심이요, 그것이 불교 수행법인지 아닌지를, 정법 수행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준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든 수행에 지관이 함께 하면 그것은 바른 정법의 수행이지만, 지관 수행이 함께 하지 않는 수행법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 _ 법상스님, 목탁소리 http://www.moktakso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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