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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강좌 : [불교교리강좌] 삼법인 강의 (7) - '나다'하는 아상의 타파
제법무아 강의 (2)

'나다'하는 아상의 타파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며, 먹고 자고 마시며 움직이고 일을 하는 내가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나까지를 다 부정하며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합의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왜 무아인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보통 우리가 ‘나다’라고 하는 데는 먼저 ‘내 몸’, 즉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 ‘내것이다’고 하는 내 소유물에 대해 나라고 생각하고, 또한 ‘내가 옳다’고 하는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견해나 사상 등을 나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내 느낌’ㆍ‘내 감정’이나 ‘내 성격’에 대해 나라고 느끼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물으면 우리의 대답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외모나, 경제력이나, 능력 등을 말하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것들을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을 ‘나다’ 혹은 ‘그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모든 것들이 나인가? 내 몸이나 소유물이나 생각이나 성격이나 감정이 과연 실체적인 나인가?

먼저 내 몸이 나인가? 사람이라는 정체성, 남자라는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이 나인가? 나를 규정짓는 외모나 재능이 나인가?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양과 흙과 바람과 비와 구름과 풀과 나물과 물과 부모님, 형제, 이웃들이 있어야지만 나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연기의 화합이 있어야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먹은 음식물과 지난 과거에 먹었던 것들로 인해 지금의 내 몸은 인연따라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번 생에 잠시 지난 생의 업과 인연에 따라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며, 남자로 태어났을 뿐이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고, 부잣집에 태어났고, 능력 있게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이번 생을 살아나가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곤충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여자로 혹은 가난한 사람, 능력 없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규정짓는 요소들, 이를테면 ‘사람’이라거나 혹은 ‘남자’ 혹은 ‘외모’나 돈과 명예, 능력이나 재능 등이 나를 대변하는 실체적인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요소들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일 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나 외모는 단지 억겁의 윤회 속에서 잠깐 동안 빌려 쓰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내것이다’라고 하는 내 소유에 대한 것들이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소유한 것들을 나와 동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부자이거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거나, 좋은 집에 살거나, 소유한 것들이 많거나, 많은 통장 잔고 등은 나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정보 가운데 하나다.

요즘 결혼정보회사 같은 곳에서는 동반자를 찾는데 필요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데이터화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나다’ 혹은 ‘너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의 총체가 바로 그 데이터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데이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의 소유, 그의 재산 내역이다.

그러면 현대사회에서 나를 규정짓는 그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소유물’이 바로 나일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나를 대변해 주는 것들일까. 그렇지 않다. 소유물들 또한 인연따라 나에게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하지 않는다. 길어야 100년도 소유하지 못하고는 다 버려야 할 것들일 뿐이다.

인간 세상에서의 400년이 도솔천의 하루이고, 인간의 1,600년이 타화자재천의 하루라고 하니, 천상에서 본다면 인간세상의 100년이라야 찰나의 눈 깜짝 할 사이 밖에 되지 않는 시간일 뿐인 것을, 온갖 욕심과 집착으로 소유물들을 늘리려고 하지만 그것이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의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소유물들과 재산을 실체적인 내 소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잠깐 사이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공허하고 텅빈 것들일 뿐이며, 무아일 뿐이다.

그러면 ‘내가 옳다’는 내 견해가 나인가? 내 생각, 내 견해, 내 사고방식, 내 가치관, 내 세계관이 나인가? 그것들도 다만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인연따라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해적의 자식에게는 해적 두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삶의 목적이라고 하듯이, 우리의 견해나 가치관은 내가 살아 온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견고한 ‘내 생각’이며, 견고한 ‘진리’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거나 ‘내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진리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100% 순수한 ‘내 생각’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두 배워 온 것이거나,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나 학교에서 얻어 들은 것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생각이 ‘내 생각’이며, ‘내 가치관’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을 하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인 것도 아니다. 인연따라 다만 수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할 수는 없다. 인연따라 어떤 상황에서는 선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악할 뿐이지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다.

그러면 내 성격이 나인가? 그 또한 그렇지 않다. 성격도 끊임없이 변한다. 악하던 사람도 어떤 계기를 통해 개과천선하여 선하고 진중한 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고, 아무리 선하던 사람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삶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죄인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 사람 성격이 어때?’ 하고 물으면 ‘좋아’ 혹은 ‘별로야’, ‘나빠’라고 대답하곤 하지만, 어떻게 성격이 좋거나 혹은 나쁠 수가 있는가. 모든 성격은 서로 다를 뿐이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떤 성격을 좋거나 혹은 나쁘다고 규정짓고 거기에서 좋은 성격을 채택하기 위해 애쓰면서부터 성격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고, 그 집착에서 ‘내 성격’, ‘네 성격’이라는 구분이 생겨난 것이지, 본래 정해진 성격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 성격’이라는 것도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 중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성격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좋았을 때의 성격을 내 성격이라고 할 것인가, 나빴을 때의 성격을 내 성격이라고 할 것인가. 인연따라 성격도 끊임없이 변할 뿐이지 정해진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을 성격의 좋고 나쁨으로 판단해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 또한 제법무아를 모르는 어리석은 행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느낌은 실체적인 것일까. 그것 또한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슬픔, 기쁨, 우울, 질투, 들뜸, 아픔, 증오, 행복 등의 감정 또한 실체가 아니다. 인연따라 수많은 감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가, 그 사랑이 이루어지면 ‘행복’의 감정이, 또 그 사랑이 떠나가면 ‘슬픔’ㆍ‘아픔’ 등의 감정으로 바뀌었다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가면 ‘질투’와 ‘증오’로 바뀌고, 그런 아픔에 사로잡혀 머물게 되면 심각한 우울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의 인연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 온갖 풍랑 같은 느낌과 감정을 겪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생겼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가끔 보면 인연따라 생긴 괴로움, 아픔, 증오, 우울 등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실체적이고도 언제까지고 계속될 감정으로 착각하여 너무 깊이 괴로움에 빠진 나머지 삶을 그르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심한 우울증에 자살을 하게 된다거나, 증오 때문에 '욱' 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사고를 일으킨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감정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현상들이다.

감정이라는 것 또한 제법무아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인연따라 오고 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이 되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제법무아의 실천은 나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소유에 대한 집착, 심지어 감정과 성격과 현실에 대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글 _ 법상스님, 목탁소리 http://www.moktakso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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