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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강좌 : [불교교리강좌] 삼법인 강의 (16) - 열반적정의 의미
     열반적정(涅槃寂靜)

사법인의 관계 -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의 관계

이상에서 삼법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 대한, 나아가 이 우주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이요 특성임을 알았다. 무상과 무아를 벗어나는 것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무상무아야말로 수레의 양 바퀴와도 같은 ‘법의 도장’, ‘진리의 도장’, 법인(法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삼법인에서 제외시키는 경우는 없지만, 세 번째 법인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는 엇갈리곤 한다. 많은 책들이나 스님이나 교수님들께서도 삼법인을 설할 때 때로는 일체개고를 또 때로는 열반적정을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맞는가. 보통은 열반적정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열반적정을 넣자니 일체개고 또한 빠질 수 없는 법인이라 삼법인을 넘어 사법인(四法印)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두 가지, 열반적정과 일체개고는 어떤 관계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상과 무아라는 두 가지 법인에 대한 깨달음과 통찰의 유무에 의해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설명 한 두 가지 법인인 무상과 무아에 대해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과 통찰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무상과 무아라는 법인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깨달음을 가질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 법인이 나뉜다. 무상과 무아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렇듯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이 세상이 곧 ‘일체개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안 사람은 더 이상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것들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속박, 구속, 번뇌, 집착,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바로 이렇게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모든 욕망과 번뇌, 구속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고요한 적정(寂靜)의 상태인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안 이들에게 이 세상은 곧 ‘열반적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은 서로 다른 특성이라기 보다는, 앞의 두 가지 법인인 무상과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의 유무와 관련된 법인인 것이다.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고,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깨달았을 때 열반적정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지 못한 이에게 이 세상은 일체개고이지만,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면 곧 열반적정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삼법인만을 설한다면 일체개고 보다는 열반적정을 넣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중생세간의 특성만을 살핀다면 일체개고가 들어가야 하겠지만, 세간과 출세간의 특성을 두루 살핀 가르침이라면 마땅히 열반적정이 들어가야 옳을 것이다.


삼독의 소멸이 열반이다

열반이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다. 그런데 앞서 삼법인은 연기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했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삼법인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했다. 즉 연기되어진 모든 것은 곧 삼법인의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열반이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이면서 동시에 연기법을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와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인연 따라 변화하는 비실체적인 것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도 내 밖의 모든 대상들도 모두 텅 비어 있으며,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그것이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고, 항상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장에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살아 숨쉬며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말하는 생생한 ‘나’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아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연기하면서 변화할 뿐. 사실 우리는 ‘나’라는 어떤 고정적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에 집착하고, ‘내 것’에 집착하며, ‘내 생각’에 집착하는 등 끊임없는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아상과 아집은 모든 번뇌의 근본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가져온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소를 우리에게 가져온다. ‘나’와 ‘내 것’, ‘내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탐욕과 집착이 생겨난다. 내 것을 더 많이 늘리려 하고, 쌓아나가려 하는 탐심이 생겨난다. 또한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하고 싶어하는 생각과 견해에 대한 탐심도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내 생각대로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나에게 누군가가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할 때도 내 안에서는 불길처럼 화가 들끓는다. 이처럼 아상과 아집이 있을 때 우리 안에서는 진심(嗔心)이라는 화와 성냄이 일어난다. 이처럼 무아를 모르는 데서 아상이 생겨나는데 이렇게 실체적인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나’, ‘내 소유’, ‘내 생각’ 등이 있다고 고집하는 그것이 바로 치심(癡心) 즉 무지(無智)이다.

이렇게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치심이 일어나고 치심은 곧 탐심과 진심을 가져온다. 이렇게 탐진치 삼독이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난 삼독은 더욱 더 우리를 옭아매며, 구속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살펴보라. 탐진치 삼독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문제며, 괴로움이며, 아픔이며, 슬픔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그 탐진치 삼독의 원인은 바로 연기와 무상과 무아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상응부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탐심의 소멸, 진심의 소멸, 치심의 소멸,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적정의 의미

열반적정은 열반이 적정하다는 뜻으로, 열반은 적정과 동의어다.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끊임없이 내면에 탐진치 삼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탐욕의 불길이 끊이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조금만 참지 못할 일이 생겨도 성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그 근본에는 어리석음이라는 무지의 불길이 불같이 타오르고 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불길은 끊임없이 타오를 지언정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고 있다. 이 탐진치 삼독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일시에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연기법과 무상과 무아를 깨달아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성냄이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곳에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고요가 저절로 피어난다. 다툼이 없는 완전한 무쟁(無爭), 분별이 없는 완전한 고요, 나뉨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투쟁도 없고, 분별도 없는 완전한 고요의 상태, 이것을 ‘적정(寂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무상 무아 연기와 열반

지금까지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조금 더 열반적정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유추해 보자. 열반적정은 무상의 이치를 깨달아 그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이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이치를 알기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러 안주하지 않는다. 변화에 몸을 맡기고 다만 함께 따라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항상 생기롭고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줄 알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일으킨 어떤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리지 않는다.

또한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 ‘나다’하는 아상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다. 나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생사에 걸림이 없고, 높고 낮은 직책이나 명예에 걸림이 없으며, 남들의 칭찬과 비난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칭찬받을 나도 없고 비난 받을 나도 없는데 남들의 말에 휘둘릴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잘 되고자 남들을 짓밟는 것도 관심 밖이다. 나라는 아상이 없기에 나와 상대가 둘로 나뉘지 않는 자비로움이 움튼다.

‘내 것’이라는 내 소유에 대한 집착도 없다. 모든 소유물도 실체가 없으며, 그 소유물을 소유하는 주체인 나 또한 텅 비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축적하지 않고, 벌려고 애쓰지 않으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산다. 미래를 계획하거나 미래를 위해 자금을 모으는 일 따위는 완전히 관심사항이 아니다. 다만 순간 순간을 100% 누리고 만끽하며 살 뿐이다. 또한 내 생각이나 내 견해에 대한 고집도 없이 세상 모든 견해에 활짝 열려 있다.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을 편견 없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그 어떤 다툼도 없고 성냄도 없다.

또한 연기법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인연 따라 펼쳐지는,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 모두 인연 따라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안다. 그 어떤 문제가 오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인연에 순응하며 받아들인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온 우주의 도움이 있음을 안다. 내 이웃과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 또한 나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 조화로운 도움을 주었음을 알기에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로운 감사와 찬탄이 매 순간 이어진다. 또한 연기되어진 모든 존재들과 조화로운 공존의 삶을 살아나가고 나아가 나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의 자각을 통한 자비와 사랑이 꽃피어난다. 매 순간 동체대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나눔과 보시를 베푼다는 상 없이 베푼다.



글 _ 법상스님, 목탁소리 http://www.moktakso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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