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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 좌선坐禪 (2)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 허물을 보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이는 자성自性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안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 허물을 안 봐요. 왜 허물을 안 보는가.  예를 들면 누가 내게 불이익 주고 욕을 했다고 합시다. 있다-없다의 양변에서 보면, 내가 불이익 받고 욕까지 먹었으니 같이 욕하고 보복하며 싸워야 하거든요.

그런데 안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조용하다-시끄럽다를 여읜 사람, 깨끗하다 -더럽다를 여읜 사람, 이런 사람들은 나의 본래 존재원리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존재원리까지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너의 존재원리는 본래 그렇게 안 생겼는데 너는 착각에 빠져 그런 차별심을 가지고 나한테 욕을 하고 있으니까 불쌍하다” 깔보는 것이 아닙니다. 너하고 나하고 손톱만큼 다르지 않게 평등한데, 네가 착각에 빠져 그렇지 본래 너의 존재원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는 입장에서 그 사람을 대합니다. 그것은 평등하게 대하는 거예요.

앞에서 서산ㆍ사명 스님도 그런 입장에서 전쟁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안 보는 겁니다.

뒤에 “26. 참청參請” 편에 나오는 대목입니다만, 신회가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허물 안 본다는 것은 남이 나에게 불이익을 줬을 때, 그 불이익을 줬다고 나도 같이 화를 내면 그 화내는 자체가 내 허물이 됩니다. 남이 화를 내든 말든 나는 스스로 보호하면 됩니다. 그래서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보라” 합니다. 여기도 그런 내용이 조금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 시끄럽다-조용하다 거기에 안 움직이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일체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성품이 움직이지 아니함이요. 남이 아무리 나를 화내게 하더라도 내 존재원리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안 움직입니다. 내 허물을 안 짓는다는 말입니다.

“내 허물을 보라”와 가톨릭의 “내탓이오” 운동

한때 가톨릭이 “내 탓이오” 운동 했지요. 지금은 안 하죠? 이 운동이 <성경>에 근거하여 이론적인 개발을 깊이 했다면 계속할 겁니다. 그런데 그쪽에 이런 말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 분들이 내 탓 운동하다가 흐지부지할 수밖에 없지요.

처음 “내 탓이오” 운동할 때 “아! 저거 우리 불교에서 해야 하는 건데 … ”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가톨릭에 이 <단경>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면 “내 탓이오” 운동이 깊이 들어갈 수 있었겠지요.

어쨌든 내가 안 움직이어야 합니다. 남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어요. 그것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면 내 허물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진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다.”

미혹한 사람은 시끄럽다-조용하다, 깨끗하다-더럽다 하는 견해에 빠져 있는 사람이니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옳고 그름을 말합니다. 계속 동하는 거지요.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본다’ 이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보는 것은 양변에서 보는 겁니다. 깨끗하다-더럽다, 마음이다-마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도는 본래 그런 것을 초월하는 그 자리이니 이것은 아닙니다.

좌선(坐禪)이란 무엇인가?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無碍)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이 법문 중에 일체에 걸림이 없어(無碍) 있다-없다, 더럽다-깨끗하다, 시끄럽다-조용하다를 초월하면 어디에도 걸리지 않아요.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또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거기에 공부하는 거예요. 덥다고 시원한 데 찾아가고 시끄럽다고 조용한 데 찾는 그런 것은 걸림없는 삶이 아니에요.

밖으로 일체 경계는 시끄러운 경계나 조용한 경계 위에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이 좌선坐禪할 때 앉는 좌입니다. 일체 경계에 안 끄달리는 것이 좌坐예요. 또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그것이 좌선이다.

그러니 안팎으로 어떤 경계도 끄달리지 않고 지배받지 않고 공부를 하게 되면 그게 좌선입니다. 앉아 있다고 다 좌선이 아닙니다. 앉아 있어도 경계에 끄달리면 좌선이 아니지요. 물구나무를 하든지, 시장이나 거리에서 물건을 팔든지 사든지, 안팎으로 시끄럽다-조용하다, 좋다-나쁘다에 안 끄달리고 있으면 그 사람은 24시간 좌선하고 있는 거예요.

“또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밖으로나 안으로 두 모양(相)을 여의니까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요? 어지럽지 않지요. 끄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이나 밖으로 모양에 끄달려 지배받아 비교하고 좋다-나쁘다에 열등의식도 느끼고 우월의식도 느끼는 그것은 어지러운 것입니다.

“만약 밖으로 모양(相)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하다.”

이것은 말에 조금 모순이 있어요. 밖으로 만약 모양이 있으나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이 스스로 정定이다. 모순이 되는 것 같아 <덕이본 단경>을 찾아봤어요. 거기에는 상세하게 쓰여 있어요. “만약 밖으로 모양이 있으면 안으로 곧 어지럽고, 밖으로 모양을 여의면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아니하다” 이 두 구절이 있습니다. 그게 훨씬 분명합니다. 이 <돈황본>에는 두 구절을 생략한 거예요.

“만약 경계에 부딪히면 어지러우니 모양을 여의고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여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는 것이 곧 선정禪定이라 이름한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즉시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하였고, <보살계>에 말하되,  ‘본래 근원인 자기 성품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선지식아, 자기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짓는 것이 자기 성품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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