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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 무념無念 (5)
정견正見 =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空” 이해

결국 이런 것이 모두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게 아니고 <반야심경>의 첫 구절인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이거 하나만 알면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죠.

지금 듣고 보고 오고 가고 하는 이 몸이 분명히 있는데 왜 무아無我냐? 왜 공空이라고 하느냐?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입니다. 이것을 외우다시피 해야 합니다. 지금 왔다 갔다 듣고 보고 하는데 왜 자꾸 공이라, 무아라고 하느냐?

우리는 이 껍데기 형상만 보고 자꾸 “있다”고 집착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걸 “실체가 없다”, “공이다”, “무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부처님이 깨달은 법입니다.

그러면 왜 무아이고, 공이냐? 연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연기가 뭐냐? 앞에서도 잠깐 설명했지요? 그때 이해 못한 분은 “연기가 뭐냐?” 하는 것을 화두 삼아 이걸 보면 연기가 뭐라 하는 것도 이해하게 됩니다.

□ 그러나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는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無念도 또한 서지 않는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자기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반드시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다. □


“그러나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는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無念도 또한 서지 않는다.”

이 견해를 여의는 것도 있다-없다 하는 견해를 여의는 겁니다. 있다-없다 하는 견해를 여의어 버렸으니, 좋다-나쁘다, 높다-낮다, 귀하다-천하다 하는 생각을 안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그 무념도 세우지 않는다. 즉,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는다 하니 또 그것까지 집착하면 안 된다. 거기에도 세우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안 일어난 사람은 무념이 되는데 그 무념도 세우면 또 무념에 집착하니 그것마저도 해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양변을 여읜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부처님의 비유

부처님 당시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큰 강에 나무가 하나 떠내려가는데 양변에 안 부딪치고 가운데로 잘 가요. 이것도 우리 의식을 비교한 것입니다. 있다-없다, 천하다-귀하다 이걸 일으키면 나무가 강을 내려가면서 양쪽 변에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무가 상처를 받지요? 어디에도 안 부딪치고 잔잔하게 한 가운데로 내려가면 상처가 나지 않지요. 비유를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섬이 있는데 그 섬에도 부딪치지 않고 잘 갔다는 거예요. 그 중간에 있는 섬에 부딪치면 어떻게 됩니까? 또 상처가 나고 걸립니다. 그러니 중간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양변에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집착 안 하는 중간, 그곳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요禪要>에 보면, “없다 하는 그것도 없어져야 된다”고 나옵니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이 두 모양을 여의는 것이 무념無念이다. 무無다. 그러면 이 모양(相)은 왜 여의어야 하느냐? 있다-없다는 왜 여의어야 하느냐?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앞에 “정혜定慧” 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두 모양, 있다-없다, 나다-너다 이것을 여의어야 하는데 왜 여의어야 하느냐 하면, 그 진여본성 그 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그러니까, 있다-없다 할 때 ‘있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없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지지요. 또 있다는 거기에 집착하면 비교하고, 높고 낮음을 따지고, 귀천도 따지고, 너다-나다를 따져 끝없이 자기를 학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재원리인 진여본성眞如本性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그 두 변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바로 보게 되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게 되고, 또 평등하게 보니까 좋다-나쁘다, 아름답다-추하다, 그런 차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지배받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무엇을 없다고 하느냐 하면, 이 모양이 없는 것, 양변이 없는 것을 ‘없다(無)’라 하며, 또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진여본성眞如本性, 이 진여본성은 일체 차별이 없는 그 자리를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항상 자재한다.”

자기의 성품에서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알기도 하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해서 항상 자재한다.

그런데 이 말도 깊이 따져 보면, 있다-없다 차별경계심에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차별경계를 여읜 분별경계심이 없는 사람이 자기 성품에서 생각을 일으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분별심이 없는 생각이겠지요. 그 생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해서 항상 자유한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반드시(第一義)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다.”

객관의 어떤 물체를 보든지, 어떤 사건을 보든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잘 분별한다는 것은 있다-없다의 차별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게 아니지요. 이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평등한 지혜의 눈으로 모든 모양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法相)을 분별하고, 안으로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자로 ‘제일의第一義’는 반드시라고 새겨야 합니다. 반드시 안으로는 동하지 말아야 한다. 밖으로는 모든 모양을 분별심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잘 분별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안으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어디에 끄달리거나 지배를 받거나 동요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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