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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 삼귀三歸
□ “이제 이미 참회를 마쳤으니 선지식을 위하여 ‘모양 없는(無相) 삼귀의계三歸依戒’를 주리라.”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깨달음의 양족존兩足尊에 귀의하며, 바른 이욕존離欲尊에게 귀의하며, 깨끗한 중중존衆中尊에게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삼보自性三寶는 자비로 증명하소서” 하라.
선지식아, 혜능이 선지식에게 권하여 자성삼보에 귀의하게 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라.
자기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만족할 줄 알아(少欲知足) 재물도 여의고 색도 여의는 것이 양족존이다.
자기 마음이 바름(正)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아 곧 애착이 없으니, 애착이 없음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한다.
자기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 한다.
범부는 이를 알지 못하고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진대 부처가 어느 곳이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하면, 곧 귀의할 바가 없다. 이미 돌아갈 바가 없으면, 돌아간다고 한 그 말이 도리어 허망한 것이다.
선지식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에게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


“이제 이미 참회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모양 없는(無相) 삼귀의계三歸依戒’를 주리라.”

모양 없는(無相) 삼귀의계라고 해서 세 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예요.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깨달음의 양족존兩足尊에 귀의하며,
바른 이욕존離欲尊에게 귀의하며,
깨끗한 중중존衆中尊에게 귀의합니다.


우리는 양족존을 복혜福慧로 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다르게 봤어요. 깨달음의 양족존에게 귀의한다. 바른 이욕존에 귀의한다. 깨끗한 중중존에게 귀의한다.

지금 이후로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삼보自性三寶는 자비로 증명하소서” 하라.

여기 자성삼보自性三寶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해야 한다. 나머지 유다-무다, 선이다-악이다 하는 외도들에게 절대 귀의하지 아니하고 의지하지도 않겠다. 그래서 자성삼보는 우리 마음입니다. 이 마음의 자비로 증명하라.

선지식아, 혜능이 선지식에게 권하여 자성삼보에 귀의하게 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라.

앞에서 임제스님이 마음이 깨끗함(心淸淨)이 불이요, 마음이 밝고 빛남(心光明)이 법이요, 어느 곳에서나 걸리지 않음(處處無碍)이 승이다, 그 말과 똑같습니다.

자기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만족할 줄 알아(少欲知足) 재물도 여의고 색도 여의는 것이 양족존이다.

여기가 혹 잘못된 것이 아닌가요? 보통은 ‘복혜福慧 양족존’이라 하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삿된 것을 여의어 조그마한 욕심, 이 조그마한 욕심(少欲)에서 이 ‘소少’자가 ‘없다’는 뜻도 되니, 없다고 해석합시다. 그래야 맞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없어 만족함을 알아 재물도 여의고 색도 여읜다. 이 색色은 이성異性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재물도 여의고 색도 여의는 것이 양족존이라 했는데, 재물을 부처님은 이렇게 얘기 안 했습니다.

<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수달타 장자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신심이 나서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는데 이 재산이 방해가 된다면, 재산을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니다. 너는 더 가져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부富에 대하여 결코 부정적으로 안 봤어요. 부처님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습니다.

수달타가 한문으로 번역하면 급고독원給孤獨園입니다. 배급할 급給자, 고독할 고孤자, 소외되고 배고프고 불쌍한 사람한테 배급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입니다.

부처님은 재산이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고, 그 재산을 가지는 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탐진치에 찌들어져 있는 사람은 부처님이 다 내버리라고 할 거예요. 그러나 우주를 다 갖고 있는 부자라도 탐진치 안 갖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라고 할 겁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그 재산으로 인해서 자기를 해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욕심이 없어 만족함을 알아 재물도 여의고 색도 여의니 양족존이라 합니다.

그런데 복혜福慧 양족존과 육조스님이 해석한 양족존이 조금 달라요. 의미로 보면 같다고 볼 수 있지요. 부처님이 복혜를 가졌는데 그 복이 남을 해치는 복은 절대 아니에요.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는 복입니다.

기복祈福도 청복淸福으로 하면 좋다.

그래서 <서장>에 보면 ‘탁복濁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눕니다. 부처님 복은 청복이에요. 이것은 남을 해치지도 않고 자기도 해치지도 않는 깨끗한 복입니다. 반면에 남을 해치고 자기도 해치는 복은 탁복濁福입니다. 치복癡福이라 하기도 하지요.

흔히 지식인들이 복을 비는 기복祈福을 굉장히 비판합니다. 처음에는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소유이니 복을 비는 기복불교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럼, 불교는 다 부자 되지 말고 가난뱅이가 되라고 가르치느냐’ 하는 오해가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청복과 탁복으로 나눠 얘기합니다. 기복도 좋습니다. 탁복을 해서 문제지 청복을 하면, 기복도 좋은 거예요.

그러면 청복과 탁복은 어떻게 다른가? 청복을 가지려면 지혜가 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전부 탁복이에요. 지혜를 가져야 청복을 합니다.

정견 지혜로 육바라밀을 하라.

육바라밀도 지혜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보시, 남한테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 베푸는 자체가 양변을 여의는 수행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좋은 일로 끝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물건, 받는 물건 전부 상을 떠나서 주기 때문에 주는 그 자체가 양변을 여의는 겁니다. 수행입니다. 그래서 그 보시가 선행보다도 더 의미가 깊고 더 값지다는 거지요.

지계持戒도 그렇습니다. 옛날 세대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참았거든요. 요즘은 이혼해버리지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나이 육십, 칠십이 넘으면 모두 화병이 걸립니다.

인욕忍辱, 참는 것도 지혜가 있으면, 실체가 없고 공空이다. 아무리 참기 어려운 악경계惡境界, 역경계逆境界를 만나더라도 지혜로 보아 실체가 없고 공이다고 보고 넘겨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역경계를 만나면 “그래 이건 연기야, 실체가 없어” 그리고 나를 달래요. 그러니까 훨씬 편해졌어요. 처음에는 한 번, 두 번 하다가 싱거워서 안 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싱거워지지 않고 실감이 나고 굉장히 편해져요. 그래서 편해지니까 화 낼 것도 요즘은 덜 내요.

그래서 참는 것도 지혜가 있어야 수행이 됩니다. 양변을 보아도 실체가 없다, 공이다, 이렇게 보고 참아야 그게 성불로 가는 길입니다.

지계持戒도 우리가 양변을 여읜 절대 선에서 지계하는 것이 진짜 계를 지키는 것이지 선이다-악이다 양변에서 지계하는 것은 집착만 기르고 상에 매이는 겁니다. 이것을 계금취戒禁取라 하지요. 그것은 아니에요.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이 정진도 도둑질 하는 사람 열심히 한다고 그게 정진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양변을 여의는 것을 열심히 할 때 그게 진짜 정진입니다. 육바라밀도 그렇고 모든 것이 지혜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복도 그렇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청복이 안 돼요. 그래서 정견正見을 길러야 됩니다. 정견을 기르고 이 정견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짜 복혜福慧 양족존이 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바름(正)으로 돌아가

이 바름도 정正과 사邪의 대립하는 정이 절대 아닙니다. 정과 사를 초월하는 바름(正)입니다.

생각마다 삿되지 않아 곧 애착이 없으니, 애착이 없음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한다. 자기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모든 번뇌 망념이 자성에 있어도’ 했는데, 없어야 됩니다. ‘있어도’ 하면 그것은 안 맞는 얘기예요. 양변을 여의면, 자성 자리에 가 있으면, 모든 번뇌 망념이 없어져요. 없어져 그 자성에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것을 중중존이다.

범부는 이를 알지 못하고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진대 부처가 어느 곳이 있으며,

거듭 말합니다만, ‘귀의歸依’ 라는 말이 부처님한테 가서 귀의하는 게 아닙니다. 양변을 여의는 그 자리가 귀의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이것을 묻습니다. 만약, 부처님한테 우리가 돌아가 귀의한다고 한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느냐?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하면, 곧 귀의할 바가 없다. 이미 돌아갈 바가 없으면, 돌아간다고 한 그 말이 도리어 허망한 것이다.
선지식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에게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내 부처한테 귀의한다고 그랬지, 다른 부처님한테 귀의한다고 하지 않았다. ‘귀의한다’는 말은 내 부처, 내 부처가 뭡니까? 자성自性 자리입니다. 자성 자리에 양변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게 귀의하는 것이지, 다른 부처한테 귀의하는 게 아니에요.

육조 스님은 철저히 이 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마음도 어찌 보면 유심주의唯心主義 같이 느껴지지요. 그래서 불교를 유심주의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유심주의 말 속에 유물주의唯物主義와 반대되는 유심주의를 얘기하거든요. 하지만,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말한 유심唯心은 유물주의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絶對 유심唯心입니다. 여기에는 꼭 생명에만 있는 마음을 얘기한 것이 아니고 무정물無情物도 자성 자리, 또 유정물有情物도 자성 자리, 모든 자성 자리를 통틀어 불교는 마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꼭 생명 있는 것만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는 유심이다-유물이다 하는 그런 유심이 아니고 절대 유심이다. 절대 유심은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그 자성 자리를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一切唯心造)”고 합니다.

이 자성 자리, 법성法性이라고 할까, 자성自性이라고 할까 그 자리를 안 보고 껍데기만 보기 때문에 그 자리가 있는 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하니까, 항상 겉모양만 보고 비교하면서 자기도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성 자리를 봐서 있는 존재 그대로 보는 것이 견성見性이고, 도인道人이다. 범부가 크게 부처님하고 어긋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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