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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쯤이었을까. 그 해에 나는 한 사람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가한 수행승이 사랑의 그물에 걸려 번뇌에 허덕이고 있는 꼴이었다. 세속의 인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출가 본분에도 어긋날뿐더러 내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이성의 감정은 입산할 때의 마음처럼 후딱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타고 남은 재가 남김없이 바람에 스러지듯이 홀가분하게 그녀를 잊을 수 있었다면, 그 해의 가을은 그리 길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을 단풍은 짧고 낙엽지는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졌다. 늦가을 낙엽처럼 내 젊은 날의 번민들이 날마다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마주 선 벼랑만큼이나 가까이 있으면서, 때론 해와 달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애닯기만 한 인연이었나보다. 수행자가 사랑의 감정에 깊이 침잠하면 수행 일상이 온통 흔들린다. 암자 뒤켠의 대숲에 바람이 불어도 그리움에 쉬이 잠들지 못했고, 하얀 달빛이 창호에 비치는 밤이면 나도 모르게 명정酩酊에 젖어 신음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사랑을 칼날에 비유한다. 칼끝에 묻어 있는 달콤한 꿀은 조심하지 않으면 혀에 상처를 입고 만다. 이를테면 사랑이 주는 빛과 그림자를 말씀하신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당시의 화두는 정말 내 앞에 놓인 어떤 벽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좌선할 때 마주하는 벽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갈등 구조를 표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자신 앞에 가로 놓인 벽을 무너뜨릴 때 화두의 숙제는 술술 풀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벽을 타파하는 일보다는 자신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을 때가 많다. 어쩌 보면 나 역시 내 안의 벽을 허물지 못해 그토록 힘들어하였는지 모른다. 예컨대, 서로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그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얻지 못했을 때 현실과 사랑은 고통의 굴레다. 내 경우에는 지계持戒의 무게가 하나 더 보태진다. 계율에 윤리적 부담감을 지우고 나면 죄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승속에 관계없이 사랑은 언제나 사회적인 통념과 명분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파괴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내게는 그러한 통념의 벽을 부수어버릴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게다. 사실 승복을 벗는 일은 입산할 때보다 몇 배의 용단이 필요하다. 하물며 어떤 한 사람을 위해 하산을 감행하는 일에는 결심이 태산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때만큼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을 실감해본 적은 없다.
지난 해 가을이던가, 그 시절에 살았던 암자에 들른 적이 있다. 추억의 장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월은 우리를 너무 빨리 변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지나면 상처는 없고 아문 흔적만 남듯이, 지금은 번민과 갈등은 온 데 간 데 없다. 번뇌가 있어야 깨달음이 있듯 신산辛酸의 시간 또한 구도의 한 과정이다. 그래서 그곳을 찾을 때마다 무슨 기념관을 참배하듯 나만의 감회에 젖는다.
내부의 벽이 무너지고 나면, 자신을 시험하는 외부의 벽은 없어지는가보다. 결국 벽이란 수행길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장애를 뜻한다. 이제는 허물 수 있는 벽보다는 오히려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수행의 담장을 하나 세우고 싶다.
('현진스님의 잼있는 스님이야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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